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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의 오후
윤기평  |  cmkcap@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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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9.03  22: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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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역 화장실에서 바지의 지퍼를 올리고 돌아설 때에 저 만치 출입구 쪽에서 전동휠체어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운전하는 솜씨가 능숙한 것으로 보아 탑승자는 꽤나 오랫동안 장애를 지니고 살아온 듯하다. 그는 휠체어를 장애인용 소변기 앞에 비스듬히 갖다 대고는 한참 동안이나 머뭇거리며 앉아 있었다. 비록 남루한 차림새였으나 갸름하고 희뿌연 얼굴에 반백의 턱수염을 단정하게 가꾸고 있는 그의 인상은 흡사 이발소에 붙어있는 예수의 초상처럼 자못 지적이고 서구적이기까지 한 50대 중반의 모습이었다.

“불편하신가요?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나는 그가 당황하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아, 네. 괜찮아요. 왼쪽 다리에 피아노가 달려있는 것처럼 무거워요. 고맙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고도 느린 동작이었으나 나의 팔을 살짝 잡았을 뿐 거의 혼자의 힘으로 변기앞으로 다가섰다.
“사고를 당하셨나 봐요?”
그냥 서서 지켜보기는 무엇해서 나는 할듯 말듯한 소리로 뻔한 질문을 던졌다.

“15년전에 사우디에서 롤쓰로이스에다가 스튜어디스 여섯명을 태우고 180키로로 달렸는데 앞에서 200키로로 달려오던 차와 부딪쳤어요. 두 사람이 죽고 나는 1년동안이나 식물인간이었어요”
사고 당시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차도 세계에서 가장 비싼 무슨 고급승용차라고 했는데 무엇이든 고급브랜드에 관한 지식이 빈약한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는 말을 걸어오는 사람을 무척이나 기다려온 듯 했다. 나는 그의 말을 열심히 들어주기로 마음 먹었다. 그 것만이 내가 그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치료비가 수십억 들었어요. 돈이 나를 살린거죠. 저요? 그 땐 일 년에 수십억씩 벌었어요. 가수 조아무개하고 대마초를 십여년씩이나 하던 사이였어요. 헤리콥터를 몰고 놀러 다니던 내가 이런 휠체어를 타야 하다니... 지금은 팔다리가 많이 좋아진 거예요. 처음에는 산송장이나 다름없었거던요. 그 동안 아내는 도망가고 자식들은 찾아 오지도 않아요. 3년째 혼자 살아요. 여기 마트에 천원짜리 물건 사러 오는게 고작이지요. 그런데 선생님 참 고맙습니다. 이렇게 관심가져 주시고...”

변기 앞에 선채로 준비된 대본을 읽어 내려가듯이 그의 일대기가 줄줄 이어져 갔다. 그러나 그는 끝내 소변을 보지 못하였다. 한참을 서있어도 변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나의 부축을 받아가며 어렵사리 휠체어에 앉은 그는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빠르게 저쪽으로 사라져 갔다. 얼마나 사람이 그리웠을까?

상당한 과장과 허풍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사용하는 말투와 어휘의 수준으로 보아 적어도 과거에는 그가 지금과는 반대의 생활을 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돈으로 망하고, 돈으로 생명을 구하고, 이제는 돈없이 외롭고 괴로운 삶을 전동휠체어에 싣고 다니는 그의 뒷모습에 뒤숭숭한 생각들이 겹겹이로 스쳐갔다.

“형님, 좀 늦으셨네요? 송년사부터 한 말씀하세요!” 휠체어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송년모임의 약속시간을 훌쩍 넘긴 모양이었다. 나는 잔을 높이 들고 외쳤다. “음주운전하지 말고, 돈있다고 방탕말고, 마누라한테 버림받지 않도록 야무지게 처신하고, 자식들에게는 퍼주지도 말고 의지하지도 말고, 무엇보다 제 몸 알아서 잘 챙기고 건강하게...자!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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